여호수아는 모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를 맡게 된 여호수아의 정복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남다른 심리전과 전략을 통해 승리를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60프로 내외의 완전 정복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 이유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봤지? 약속 지켰다
이집트 노예 출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온 모세는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고, 그것을 빌미로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로 돌게 하며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뒷일을 맡겼고 여호수아는 온갖 특이한 행동으로 겨우겨우 과반을 넘게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점령 과정에서 미흡한 적도 많이 보였습니다.
가나안에 속한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를 속여 화친을 맺었고요. 미흡하고 미숙한 가운데도, 하나님이 전쟁에 개입하여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등 기적을 통해 군사적 승리를 확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복 과정에서 폭력과 학살, 특히 여리고를 초토화시킨 점 등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책의 말미에는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하나님은 질투가 많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를 이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도 합니다.
부분적 점령에 불안한 권력 포장
여호수아는 일종의 승리 선언문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미비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강조한 것은 아닌가 하는데요. 일단 그럴듯하게 땅도 나눠갖고 터를 이루고 살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불안한 시작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로운 정착이라기보다는 강한 중앙권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각자도생 하라는 신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런 과정에서 공공의 적을 만들어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국힘당 하는 짓이 딱 그렇잖아요. 말도 안되는 인간들이 설치고, 제대로 바른말하는 사람들은 배신자 운운하면서 온갖 음해를 일삼잖아요. 한동훈을 배신자로 프레임 씌우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위기가 왔다는 신호탄으로 보입니다. 자기네들 사이에서 균열이 생겼기에 자꾸 실체 없는 적을 만들고, 그래서 부정선거니, 간첩이니, 한동훈 배신자니 하는데요. 이런 한국의 현대 정치사와 고대 이스라엘 집단의 행태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속해서 의심하고, 너 하나님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야, 계속 이런 식이잖아요.
그렇게 찬란한 신화를 써내려가고 땅을 갖니 마니 별 생쇼를 다했지만 여호수아 사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분에 분열에 아주 가관이었을 것 같은데요. 포장된 정복의 허망함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첫 장의 언약궤 들고 생쇼 할 때부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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