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과 아도니세덱은 모두 예루살렘의 왕으로 이름에 의로울 의(義), 혹은 의로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이전 살렘의 왕이던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섬기고 아브라함을 축복한 의로움 혹은 올바름의 상징인 반면, 아도니세덱은 하나님과 대적하다 여호수아에게 심판을 받은 거짓 의로움을 대표합니다.
같은 이름 다른 결과
시시각각 가치관이 바뀌는 성경 같기도 하지만 본질을 중시한다고 치고, 특히 인물 간의 대조를 통해 의로움, 혹은 올바름의 결을 대조하는 서사가 많은 편입니다. 세덱은 의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성경에 멜기세덱과 아도니세덱이 바로 그러합니다. 같은 땅 예루살렘의 왕이었지만 두 왕은 다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하는 서사가 나옵니다. 기원전 2000년대로 추정되며 이후 약500년 후에 등장하는 아도니세덱은 여호수아 10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남방 왕들을 모아 연합군을 꾸립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한 인물이 됩니다.
시간의 흐름과 영적 타락
멜기세덱이 살던 시대는 아브라함의 시대, 곧 가나안 땅의 종교적 풍토가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멜기세덱은 그 속에서 드물게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왕이었고, 제사장직과 왕권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00년이 흐른 뒤, 같은 땅을 다스리던 아도니세덱은 철저히 하나님을 외면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자체도 타락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살렘은 ‘평강’의 도시였지만, 가나안 풍습과 우상 숭배가 뿌리내리면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됩니다. 이 변화를 통해 성경은 한 도시, 한 이름, 한 전통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진정한 의로움은 혈통이나 위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 안에서 유지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신학적 메시지
성경은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습니다. 어찌보면 아브라함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왕으로서 왕권과 제사권을 함께 가진 최초의 인물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예표하는 인물로 재조명됩니다. 그는 세덱 즉 의로움을 구현한 인물로 나옵니다. 반면 아도니세덱은 하나님을 대적하다 여호수아에게 심판당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예수아, 즉 예수의 이름과 동일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대표하는 자로 거짓된 의를 지닌 왕 아도니세덱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론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은 표면이 아닌 누구의 편에 서 있느냐로 결정된다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의 양면성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 혹은 평강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다르게 가장 많은 전쟁, 배신, 심판, 회개의 무대가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평화의 도시가 될 수도 있고, 심판의 도시가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다시 왕들의 얘기로 넘어가 멜기세덱과 아도니세덱은 같은 땅, 같은 이름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영적 길을 걸었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과 의의 상징으로, 다른 한 사람은 대적과 심판의 상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극적인 대조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나름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름뿐인 의로운 자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인가, 뭐 이런 것인데 신앙을 빼고서라도 남다른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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